이케다 다이사쿠 희망의 이야기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 - 아놀드 토인비
나는 터키야말로 동서를 연결하고 남북을 연결하는 요충지이며, 인류융화를 위한 불가사의한 사명을 지닌 나라라고 항상 생각해왔다. 실제로 터키 속에는 아시아도 있으며, 유럽도 있다.

1992년, 나는 이스탄불 시내의 ‘보스포러스 해협’을 응시하고 있었다. 30년만의 터키 방문이었다. 좁은 해협의 서해안은 유럽, 동해안은 아시아다.
서쪽에서 온 여행객은 이곳에서 그윽한 향기의 동방 세계를 접하고, 동쪽에서 온 여행객은 이곳에서 근대 세계의 정복자인 서양과 만나게 된다.
어느 쪽에도 세계는 ‘다른 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북쪽은 러시아를 비롯한 ‘슬라브세계’ 남쪽은 ‘지중해’와 ‘아프리카’

소련 붕괴 이후, 터키계의 5개 공화국 - 카자흐스탄, 키르키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과 맺은 새로운 연대. 시인 호메로스가 태어나고 알렉산더 대왕이 활보했던 터키. 한 때는 그리스 문명이 번영하고, ‘비잔틴제국 시대’에는 기독교 세계의 최고 중심지였으며, ‘오스만투르크 시대’에는 이슬람 문명의 중심지였다.

역사의 색채는 마치 만화경 속과도 같이 오늘날 이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도 실로 다양하다. 아랍 계통의 얼굴, 몽골 계통의 얼굴, 그리스 계통의 조각상과 같은 얼굴, 러시아 계통 그리고 동유럽 계통의 얼굴.
터키의 대지는 인류 전체를 감싸 안아 하나로 만들려는 듯하다.
‘서쪽 세계여, 나의 품 안에서 동쪽이 되어라! 동쪽 세계여, 나의 터전에서 서쪽이 되어라’라고.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 박사.
정말 그리운 분이시다. 박사와는 2년에 걸쳐 총 열흘 동안 대담을 나누었다. 그 내용은 대담집 <21세기를 여는 대화>로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방문한 나라에서 뜻밖의 사람으로부터 책을 읽고 난 감상을 듣고 놀랄 때도 많았다. 토인비 박사에게도 터키는 특별한 땅이었다.
박사가 다른 역사가들보다 더 빨리 ‘서양 중심 사관’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터키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런던에 있는 자택에서 박사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일찍이 런던대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터키인에 대해서 내가 본 그대로를 발표했던 것이, 소위 ’터키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분노를 샀던 것입니다.”

그때가 1921년이라고 하니, 박사가 32세 때의 일이다. 2년 전부터 계속 되고 있던 ‘그리스 투르크 전쟁’의 현지 시찰을 하러 갔다.
먼저 그리스 입장에서 관찰했다. 다음에는 터키 입장에서 관찰했다. 박사에게 있어 이러한 과정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박사는 평소부터 ‘다른 한쪽 말을 더 들어보라(교부 아우구스티누스)’라는 격언에 따라 행동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박사는 다른 사람들이 ‘귀 기울이지 않을 위험이 큰 목소리’를 소중히했다.
‘사물을 똑바로 보려고 한다면 침묵하고 있는 쪽의 입장에서도 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이 전쟁에서 “발언권을 독점하고 있는 것은 역시 그리스 쪽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하는 말에 서방국가들은 귀를 기울이고 있고, 더구나 서구인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나는 그리스인의 주장은 이미 알고 있다. 그쪽은 내버려 두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터키인이 주장하는 부분이야말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박사는 터키 주민들이 학살당한 거리에도 찾아갔다. 터키 난민들이 고생하고 있는 모습도 직접 보았다. 이렇게 잔혹하고 비참한 상황들이 서유럽 세계에는 전혀 알려지고 있지 않다!
박사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그대로를 글로 적어, 영국의 신문사에 전보를 쳤다. 그리고 이 전보를 받은 ‘멘체스터 가디언’이라는 신문사의 편집장은 용감하게도 모든 것을 그대로 기사화했다. 왜 ‘용감하게’라고 할까?

서양에서는 수세기에 걸쳐, 터키인은 인간도 아니며 마치 야만적인 식인종과 같은 존재로 보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해도 오스만투르크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학살사건(1915년) [1] 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을 무렵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이 기사가 보도된 후, 각 신문에는 비난 기사가 줄지어 실렸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입에 담기조차 소름끼치는 터키인’에게 동정적인 기사를 쓰다니, 창피한 줄 알아라!”

하지만 ‘맨체스터 가디언’은 “이슬람교도에 대한 편견에 굴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영예를 오늘날 더한층 뚜렷이 역사 속에 새기고 있다. 한편, 터키 측의 반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뭐라고? 영국인이 터키 난민지에 갔었다고? 이것 참 놀랍군!”
“뭐라고? 그 젊은 영국인이 자신이 본 그대로를 글로 적어 보냈다고? 그게 정말이야?”
“뭐라고? 그가 썼던 그대로 영국 신문에 실렸다고? 믿을 수가 없군. 한 번 보여주세요. 세상에! 정말이네. 이런 일은 처음이야. 정말 처음으로 우리가 한 말이 그대로 세계에 전해졌다!”
상기된 얼굴로 신문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을 후일, 토인비 박사는 생생하게 이야기하셨다. 서양의 입장에서, 서양의 정보만으로 세계를 보아서는 그 ‘진상을 알 수 없다. 아프리카에서 본 세계가 있다. 아랍에서 본 세계가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본 세계가 있다. 소수 민족의 입장에서 본 세계가 있다.

‘국제 사회’라는 것은 ‘서구사회’의 별칭이 아니다. 박사는 이스탄불에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일생일대의 저서인 <역사의 연구>에 대한 구상을 메모하셨다.
그 후, 이 메모에 의거하여 획기적인 ‘지구인류사관’이라 할 수 있는 역사관을 확립하여 인류에게 선사해주신 것이다.

하지만 터키를 옹호했다는 것만으로 토인비 박사는 결국 런던대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33년동안, 나는 영국의 민간학술 기관지인 <왕립국제문제연구소>에서 국제문제에 관한 연보를 써서 생활을 유지해왔습니다.”

토인비 박사는 마음속으로 다짐해왔다.
‘터키인’이라는 식으로 한 덩어리로 구분 지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개개인의 인간성을 볼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결심을 일찍부터 박사는 실행에 옮겨 왔다. 직접 터키어를 배우고, 터키인과 사귀어 우정을 맺어 왔던 것이다.
‘어떠한 종교를 불문하고, 국적과 인종이 다르더라도, 그 사람과 개인적으로 사귀어 보면 반드시 그 사람이 자신과 똑같은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라며.

‘이미지의 폭력’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다양성을 한 덩어리로 취급하는 위험성은 과연 토인비 박사의 시대보다 줄어들었을까? 그렇다고 단언할 수 없다.
이미지 폭력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예로 북유럽은 ‘복지 대국인 반면, 노인은 고독해져서 자살도 많다.’고 들은 스웨덴의 한 저널리스트가 “어느 공원에 가면 ‘벤치에 앉아 있는 고독한 노인’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요? 라고 물어 주위 사람들에게 빈축을 샀다고 한다.

선입견이라는 정형화된 틀에 맞추어 찍어낸 정보가 범람하고 있다. 전쟁이 났을 때, TV에서 상대방에게 공격당하는 장면만을 계속 방영한다면, 국민의 분노를 부채질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그러한 경우, 의례적으로 자국의 공격으로 인해 타국 시민들이 아비규환이 되고 있는 광경은 방영하지 않는 법이다. 미디어의 발달이 오히려 ‘선입견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확산시킬 위험성도 대단히 큰 것이다. 이러한 함정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우선 ‘자신과 대화’를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이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나 자신은 주어진 이미지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확실한 정보에 대해 음미하지도 않고, 통째로 집어 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편견에 물들어 있지는 않은가?
나 자신은 얼마만큼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가? 확인해 보았는가? 현장에 가 보았는가? 당사자를 만났는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았는가? 악의에 찬 ‘소문’에 덩달아 장단 맞추어 춤추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 자신은 스스로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자각하고 있는 편이, ‘나는 전혀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확신에 차 있는 사람보다, 이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과의 대화에 있어서도 보다 쉽고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멈춰버린 사람은 독선적으로 된다. 일방통행이 되고 만다.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대화도 할 수 없다.
평화를 위한 ‘대화’. 그 출발점은 겸허한 ‘자기 자신과의 대화’인 것이다.

모두가 ‘지구시민’

나는 생각한다. 사람은 태어날 때, 터키인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미국인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태어난 것도,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다. 그러한 이름은 하나의 작은 ‘명칭’에 불과하다.
태어났을 때는 모두가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났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일본인을 낳자’, ‘아랍인을 낳아야지’라고 생각하며 아이를 낳았던 것은 아니다. 단지 ‘튼튼하고 건강한 생명’을 기원했을 뿐이다.
다른 나라에서,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하더라도, 장미는 장미이고, 제비꽃은 제비꽃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푸르른 보스포러스 해협 위를 드높이, 저 멀리 날아가는 구름은 그리고 바람은, 지상의 인류를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속삭이고 있을는지 모른다.
“여러분, 깨닫기 바랍니다. 이 높은 하늘에서 보면 세계는 모두 하나. 누구나가 ‘지구시민’. 미국인도 없고 이라크인도 없다는 사실을.
존재하는 것은 우연히 미국에 살고 있는 ‘밥’이라는 소년의 ‘생명체’ 또 우연히 이라크에 살고 있는 ‘모하메드’라는 소년의 ‘생명체’라는 것을. 이들은 모두가 ’지구의 자식’이다.
그런데도 나라 이름만으로 구분 지어지고, 서로 미워하라고 배운다!
여러분 알아주세요. 그 어리석음을! 그 오만함을! 이러한 증오를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일이 얼마나 ‘잔혹한’것인지를.

지금 필요한 것은 ‘지구의 인식’

그것은 머나먼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 화면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으로서 인간을 위해 “가슴 아파하는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당신이 고통 받고 있는 한, 나 역시 고통스럽다. 당신이 누구이든! 또 당신의 고뇌가 무엇이든 간에!”라는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1] 아르메이나인 학살사건: 20세기 최초의 대학살이라고 여겨지는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당시 약 1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된다. 아놀드 토인비는 이러한 잔혹행위를 남김 없이 연구하여, 이에 관해 700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작성 영국정부에 제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