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 다이사쿠 희망의 이야기
자유를 위한 사자(獅子) - 넬슨 만델라
만델라 대통령의 미소는 각별하다. 순박한 '대지(大地)를 경작하는 사람'의 깨끗함이 있다. 강철같은 신념으로 민중을 끌어온 '왕의 유화(柔和)함'이 있다. 냉정한 권력자는 도저히 이런 미소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대통령의 얼굴에는 냉혹함을 나타내는 선이 하나도 없다.

1995년 7월의 어느 오후에, 5년 만에 대화한 대통령은 자신감에 넘쳐 대수(大樹)로서의 연륜을 한 단계 두 단계 두텁게 하신 느낌이 들었다.
대통령에 취임하신 지 1년 남짓.
"높은 지위는 큰 인물을 더욱더 크게 하고, 작은 인물을 더욱더 작게 한다"는 격언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인권투쟁의 암굴왕은 건재하다. 나는 기뻤다. 권력과 끝까지 싸운 이 사람을 소중히 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소중히 할 것인가. 희수(喜壽-77세)를 맞이하는 대통령의 장수(長壽)를 나는 기원했다.
대통령도 재회를 기뻐해 주시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南阿共))과의 교류, 간디와 그의 공통점 등 대화가 활기를 띠었다. 주목 받는 후계자 문제에 대해서도 낙관적 견해를 말씀하셨다.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한결같이 유머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옥중에서도 유머로 사람을 격려하는 명인(名人)이었다고 한다.
나는 "웃음을 발명한 것은 가장 괴로움을 맛본 인간이었음에 틀림없다"는 말을 떠올렸다. 웃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생활이었던 것이다.

감옥에서 1만일. 27년 반의 옥중투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만델라는 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남아공(南阿共)의 형무소는 우리들이 자신의 이상(理想)을 추구하는 힘과 용기를 두 번 다시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우리들을 비정상으로 만들려고 한다"라고’ (메어리 벤슨 저(著) <넬슨 만델라>)

죄수복도 죄수에게서 자존심을 빼앗으려고 '고안'되어 있었다. 헐렁한 옷을 주어 피에로처럼 보이게 하거나, 반대로 작은 옷을 주어 어른이 아이들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우습게 보이게 했다.
식사도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침대도 없었다. 혹한(酷寒)의 밤에 담요 두 장은 종이와 같았다. 새벽에 일어나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자신들이 들어갈 독방을 만들어야 했던 적도 있다. 독방에서는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이야기할 상대도 없이 '1시간이 1년' 같았다.

18년간 있었던 로벤섬에서는, 여름에 석회석 잘라내기를 해야 했다. 채석장까지 쇠사슬에 묶여서 갔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딱딱한 바위층 속에서 잘라내는 것이다. 손이 저릴 정도로 쳐도 바위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간수들이 소리치며 추궁했다. 그 중에는 나치스의 십자(十字)를 주먹에 새긴 간수도 있었다. 석회석의 먼지로 그도 눈이 나빠졌다.

감옥의 '규칙'은 어느 것이나 지독했다. 게다가 그것조차 간수 멋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투쟁하기 위해 태어난 그는 여기에서도 대우개선을 위해 일어섰다. 그 때문에 심한 벌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았다. 모두가 무엇이라도 나누도록 했다. 지식도 함께 나누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만델라대학'이라고 했다.
그는 설령 '지옥'에 있더라도 그 곳 사람들을 전력으로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갔던 것이다. 간수들조차 차츰 그 불굴의 모습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괴로운 고문은 가족의 수난(受難)에 대해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이었다. 당국은 만델라 집안을 파괴하려고 했다. 집은 습격 당하고, 부인은 여러 번 체포당하고 학대받으며 직장에서도 쫓겨났다. 남아공(南阿共)의 법률로는 당국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몇 번이라도 체포·감금할 수 있었던 것이다.

희생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많은 어린이들이 아버지를 빼앗겼다. 어머니도 빼앗겼다. 그는 옥중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들었다. 젊었을 때부터 투쟁으로 지새며 어머니께 심려를 끼친 채 돌아가시게 한 통한이 가슴을 찢는 듯했다. 그리고 장남의 '사고사(事故死)' - 이 때만은 하루 종일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가. 남아공(南阿共)은 마치 그 실험장과 같았다. 아니 남아공(南阿共)의 흑인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듯했다.

5년 전에 회견할 때, 나는 '반(反)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의 전시회나 사진전, 인권강좌, 문화교류를 제안하고 실행해 왔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남아공(南阿共)의 사람들을 지원하고 싶었다.
제안에 만델라 대통령은 정말로 기뻐해 주셨다. 그의 비서였던 미어씨의 말이 나의 가슴을 에었다.

"(교육교류의) 제안에 우리들을 인간으로 대우해주시는 마음을 느꼈습니다. 남아공(南阿共)에서 우리들은 '인간'이 아니라 '검은 인종'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얼마나 이 우인들은 괴로워해왔던가.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물건에 붙이는 ‘라벨’로 본다 - 이것은 남아공(南阿共)만의 특수한 사정이 아니다. 인종억압의 뿌리에는 언제나 이런 착오가 있다. 일본에서도 그렇다.

같은 인간을 '조선인이다' '중국인이다' '빨갱이다' 등으로 분류했을 때, 상대의 기분에 대한 상상력은 작용하지 않게 된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본다' 는 당연한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된다.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어린이들을 ‘한 인간’이 아니라 ‘아이들’이라고만 볼 때, 어른은 어린이들의 마음을 볼 수 없게 된다.

남아공(南阿共)의 억압자에 의한 라벨 붙이기는 해방운동을 계속하는 ANC(아프리카 민족회의)의 조직에도 행해졌다.
"흑인에게는 스스로 생각할 힘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무리'가 소수의 지도자에게 선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나타내는 것은 ANC(아프리카 민족회의)의 실태가 아니라, 주장하는 측의 민중관일 뿐이었다.
그들은 민중을 '명령대로 움직이는 로보트'와 같이 얕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황당무계한 주장이 가능한 것이다. 운동에 담긴 개개인의 기원도 기대도 분노도,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았다.

'투쟁이야말로 나의 인생' 만델라 씨는 재판 받는 법정마저도 당당한 언론투쟁의 장(場)으로 바꾸었다. 그의 요구는 흑인을 포함한 전국민의 선거권이었다. "내가 선거권을 갖지 않은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 의해, 왜 재판 받아야만 합니까?"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1996년 'SGI의 날' 기념제언 속에서 재일(在日) 한국인·조선인에게 참정권을 인정하도록 제언했다. 영주(永住)를 결정한 약 70만 명이나 되는 분들이 일본인과 똑같이 세금을 내면서도, 선거권은 없다. 의무만 있고 권리가 없는 것이다.
이 문제에는 여러 가지 논의나 복잡한 경위가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 위에서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는 취직차별 등, 말로 다할 수 없는 차별과 박해 속에서 끝까지 살아오신 이 분들의 기본적 인권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일본이 21세기를 맞이하는 것은 과거의 '부(負-마이너스)의 유산'을 다음 세대로 넘기는 것이 된다.

전후(戰後) 반세기를 맞이했다. 지금이야말로 용기를 갖고 개혁의 흐름을 일으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권후진국이라는 오명(汚名)을 씻지 못하지 않을까.

만델라 대통령은 옥중에서 남아공(南阿共) 사람들을 고무(鼓舞)해 왔다. 통신은 불가능해도 존재 그 자체가 '희망'이었다. 누군가가 구름으로 뒤덮어 감추려 해도 태양은 태양이었다.

경제 제재(制裁)를 비롯해 세계에서도 연대(連帶)의 성원이 계속되었다. 견디다 못한 정부에서 몇 번이나 타협안이 나왔다. 그 때마다 그는 타협을 거부하고 출옥을 거부했다. "민중이 자유롭게 되지 않는 한, 나의 자유도 없다." 그의 눈에는 조국 전체가 감옥이었다.

드디어 석방의 날이 왔다. 1990년 2월 11일. 그 날은 나의 은사(도다(戶田) 제2대 회장)의 탄생일이었다. 남아공(南阿共)의 '여명'에 갈채를 보내면서 나는 똑같은 암굴왕이었던 은사를 그렸다.
이날, 만델라 대통령은 민중의 환호와 열광에 응하여 말했다.

"나는 여기에 예언자로서가 아니라, 여러분 민중의 충실한 하인으로서 서 있습니다. 여러분의 불굴의 영웅적 희생으로 인해 나는 오늘 여기에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남은 인생을 여러분의 손에 맡기겠습니다." (파티마 미어 저(著) <넬슨 만델라전(傳)>)

그를 움직이는 에너지는 인기도 아니고, 이해(利害)도 아니다. 오로지 민중에 대한 넘칠 듯한 애정이었다. 고난을 극복해 온 동지가 사랑스러웠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칭찬하고 싶었다. 껴안고 싶었다.
바로 이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 그 황금의 신념은 저우언라이 총리를 방불케 한다.

대통령의 비원(悲願)은 백인지배도 흑인지배도 아닌, 어떠한 피부색의 사람도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무지개 나라'이다. "이것이 내가 생애를 걸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죽음마저도 각오하고 있는 이상(理想)입니다."라고.

지금 일본 지도자층의 가슴에 죽음도 각오하고, 1만일의 지옥에도 견딜 수 있는 '이상(理想)'이 있을까. 민중에게 한없는 '희망'을 주고 있는 리더가 있을까.

대통령은 말씀하셨다.
"5년 전의 만남을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저 빛나는 눈동자의 청년들과 함께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아아". 나는 생각했다. "희망을 빼앗겼던 남아공(南阿共)의 청년들에게 '빛나는 눈동자'를 돌려준다. 그것이야말로 대통령의 '꿈'이다" 라고.

인류는 하나의 생명체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어딘가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한, 우리들의 참된 행복도 없다.
인류는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깨동무 하고 싶다. 남아공(南阿共)의 사람들과. 세계의 청년과. 모든 억압받는 민중과. 그 스크럼에 21세기가 있다.

아아, 그 내일을 향해! 나는 목청껏 호소하고 싶다. "내일이여! 영원히 그대야말로 위대하노라"라고.